2025년 6월, 대한민국 자치분권의 지형을 바꿀 중요한 논의가 서울 한복판에서 조용히 시작됐다. 지난 6월 16일, 서울 한국행정연구원에서 열린 ‘섬 자치행정 모델 개발 및 특례법안 연구’ 최종보고회가 그것이다. 문경복 옹진군수의 제안으로, 신안군, 울릉군이 공동 추진한 이 연구는 단순한 지방행정 실험이 아니다. 이는 섬 주민들이 오랫동안 품어왔던 질문에 국가가 처음으로 정면으로 답하는 역사적 시도이며, 대한민국 자치의 철학을 근본부터 다시 묻는 새로운 여정의, 출발점이다.

지금까지 우리의 행정체계는 철저히 육지 중심으로 설계되어, 왔다. 교통망, 의료 인프라, 교육 시스템, 행정 서비스 등 거의 모든 국가 정책과 제도는 육지에 있는 다수를 기준으로 만들어졌다. 이로 인해 섬은 법, 제도적 사각지대에 놓였고, 행정 서비스의 변두리에, 머물렀다.
섬 주민들에게는 지역 차별이 아닌 존재의 부재가 더 큰 고통이었다. 우리는 언제나 대한민국이었는가? 라는 물음이 오랜 세월 동안 응답 없이 메아리쳐 왔다.

실제로 옹진군, 신안군, 울릉군은 지리적 조건으로 인해 광역지자체에 소속되어 있으면서도 중심 행정기관과의 접근성이 매우 낮고, 섬 하나하나가 독립적 생활권을 형성하고 있는 특수지역이다. 이들은 광역-기초 간 이중 구조의 단점만을 고스란히 떠안은 채, 국비 확보, 정책 대응, 공공 인프라 확충, 민원 행정 등 거의 모든 영역에서 반복적인 소외를 경험해, 왔다.

더욱이 이들 지역은 수십, 수백 개의 유인도·무인도로 구성되어 있어 교통과 통신, 재난 안전, 물류 시스템 등 기본적인 행정 기반을 갖추기조차 쉽지 않다. 법적으로는 하나의 군(郡)으로 존재하지만, 실질적으로는 다수의 도서 자치단체를 따로 운영해야 할 만큼의 복잡성과 행정 난이도를 안고 있다. 그러나 기존 지방자치법은 이런 현실을 전혀 반영하지 못한 채 동일한 규정과 기준을 일률적으로 적용하고 있다.

이처럼 섬 지역은 균형 발전이란 말이 무색할 정도로 지속적인 행정 배제를 경험해왔다. 그런데 이제, 섬 스스로가 목소리를 내고 제도 개편을 주도하며 새로운 길을 모색하고 있다. 바로 ‘특별자치군’이라는 이름으로 말이다.

특별자치 군은 단지 행정구역의 명칭이 아니다. 이는 행정의 방식과 운영 철학을 완전히 전환하는 실험이다. 국가가 균형과 형평을 지향한다면, 이제는 법과 제도 또한 다름을 인정하고 차이를 제도화해야 한다. 특별자치 군은 이러한 인식의 전환에서 출발한다. 획일적인 행정 단위를 넘어, 지역의 특성과 주민의 필요에 기반한 맞춤형 행정이 실현되어야 한다는 이념이, 핵심이다.

이번 연구에서 제시된 특별자치 군 모델은 다음과 같은 몇 가지 핵심 기능을 포함한다.
첫째, 예산 편성의 자율성이다. 섬의 현실을 고려하지 않고 획일화된 기준으로 내려오는 예산 배분은 현실과 괴리된 사업을 낳기 일쑤다. 특별자치 군은 지역의 우선순위에 따라 예산을 유연하게 구성하고 운영할 수 있다.

둘째, 인사권 분산과 전담조직 설치다. 기존에는 섬에 배치된 공무원이 순환보직 중심으로 배정되어 업무의 연속성과 전문성이 떨어졌다. 특별자치 군은 섬 행정을 전담할 전문조직을 두고, 장기근속이 가능한 행정체계를 마련함으로써 현장성과 응답성을 제고 한다.

셋째, 지역계획 수립권의 확대다. 육지에서 만들어진 계획이 섬의 현실을 반영할 수 없다면, 섬 스스로 생활권 계획과 개발 구상을 할 수 있는 자율성이 반드시 주어져야 한다.
일각에서는 특례라는 단어에 대해 곱지 않은 시선을 보내기도 한다. 특례가 특혜로 둔갑할 수 있다는 우려 때문이다. 그러나 이 경우 특례는 회복의 도구다. 지금까지 정상적으로 제공되지 못했던 공공서비스와 자율권을 이제라도 돌려주기 위한 행정 정의의 실현이다. 육지의 기준으로 섬을 재단하는 것이야말로 역차별의, 출발점이다.

주목할 점은 이번 모델이 특정 지자체가 아닌, 여러 지자체 간의 협력적 연구와 추진을 통해 만들어졌다는 사실이다. 옹진군, 신안군, 울릉군은 서로 물리적 거리는 멀지만, 행정 환경과 정책 수요는 놀랍도록 유사하다. 이들은 경쟁이 아니라 협력을 선택했다. 이는 향후 전국의 도서 지역, 접경지역, 산간, 오지 등 소외된 행정 공간 간 연대의 좋은 선례가 될 수 있다. 섬이 협력하고, 함께 목소리를 낸다면 그것은 단지 섬의 문제가 아니라 국가 전체의 분권과 균형 발전의 문제로 확산될 수 있다.

특별자치 군은 궁극적으로 ‘존재의 회복’을 의미한다. 섬이 더, 이상 대한민국의 변두리가 아니라, 행정의 중심에 설 수 있다는 가능성을 제도화하는 것이다. 국가의 손이 닿지 않던 공간에 행정이 다시 뿌리내리는 이 과정은 단순히 섬만을 위한 것이 아니다. 이는 자치의 본질을 다시 묻고, 행정의 사명을 다시 정의하는 일이다.

이제는 질문을 바꿔야 한다. 왜 섬인가가 아니라 왜 이제 서야 섬인가.라고
이 물음에 응답하는 방식은 오직 하나다. 섬 주민들이 자존감을 가지고 살아갈 수 있도록, 그들이 필요로 하는 방식으로 행정이 설계되어야 한다. 특별자치 군은 그 시작점이며, 한국형 분권의 완성도를 높이는 실질적인 실험장이 될 것이다.

이제 서야 옹진군을 비롯한 신안군, 울릉군이 먼저 나선 것이다. 이들이 닦아놓은 길 위에 더 많은 섬과 소외된 지역들이 함께하길 바란다. 그렇게 섬에서 시작된 행정혁신이 대한민국 자치분권의 미래를 다시 쓰게 되기를 기대한다. 섬은 변방이 아니라, 혁신의, 시작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