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도권일보] 지방자치의 기본은 견제와 균형이다. 행정은 집행하고, 의회는 심의한다. 이 간단한 원칙이 무너질 때, 민주주의는 형식만 남는다. 성남시의 2026년도 본예산 편성 과정에서 드러난 행정의 태도는 그 원칙을 정면으로 거스른다.

아직 심의조차 끝나지 않은 조례를 근거로, 약 3억 원 규모의 사업 예산을 이미 본예산안 책자에 반영했다. 문제의 사업은 ‘초등학생 SOS 성남벨 지원 사업’. 이를 뒷받침하는 ‘성남시 초등학생 안심물품 지원 조례안’은 11월 21일에야 상임위원회 심의를 앞두고 있었다. 그럼에도 성남시는 10월에 이미 완성된 예산안 책자에 조례명과 사업 예산을 당당히 실었다.

이쯤 되면 묻지 않을 수 없다. 성남시의회는 무엇을 위해 존재하는가. 조례 심의는 요식행위이고, 예산은 이미 집행부와 여당 의원들 사이에서 다 짜여진 뒤 통보만 받는 구조인가.

윤혜선 성남시의원이 지적했듯, 이는 단순한 행정 착오가 아니다. 조례가 통과될 것이라는 ‘전제’를 깔고 예산을 편성한 것 자체가 의회를 사실상 무력화한 행위다. 특히 해당 조례가 국민의힘 소속 시장과 의원이 발의한 조례라는 점에서, 사전 교감과 밀실 협의가 있었던 것 아니냐는 의혹을 피하기 어렵다.

더 심각한 문제는 과정이다. 이 조례는 9월 발의됐다가 10월에 철회됐고, 이름만 바꿔 다시 발의됐다. 그 사이 집행부는 의회에 단 한 차례의 공식 설명도 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예산안 책자에는 마치 모든 절차가 완료된 것처럼 조례명과 예산이 버젓이 실렸다. 이는 행정의 편의가 민주적 절차 위에 군림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아이들의 안전을 챙기겠다는 명분은 그 자체로 반박할 수 없다. 그러나 선한 목적이 모든 절차 위에 설 수는 없다. ‘경기도 최초’라는 타이틀을 얻기 위해 절차를 생략하고, 의회의 심의를 건너뛰는 것이 과연 아이들을 위한 행정인가. 그것은 성과를 서두르는 정치일 뿐, 책임 있는 행정이 아니다.

정말 시급했다면 방향은 달랐어야 한다. 교육청과의 협의를 통해 초등학생에 국한하지 않고 초·중·고 청소년 전체로 논의를 확장했어야 한다. 더 나아가 여성, 노인, 사각지대에 놓인 청소년을 포함한 종합적인 안전 정책으로 접근했어야 한다. 그것이 행정의 책무다.

예산은 숫자가 아니라 우선순위의 선언이다. 심의도 끝나지 않은 조례를 근거로 예산을 기정사실화한 성남시의 이번 행태는, 의회를 존중하지 않는 행정 권력의 오만함을 적나라하게 드러낸다. 이 예산은 당연히 다시 검토되어야 한다. 절차를 무시한 정책은, 아무리 좋은 말을 두른다 해도 정당성을 가질 수 없다.

이같이 지방자치는 속도가 아니라 신뢰로 굴러간다. 성남시는 지금, 그 신뢰를 스스로 허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