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정부/장초복 기자] 원외탕전 관리제도의 향방을 가늠할 ‘3주기 평가인증 기준안’이 공개됐지만, 그 내용은 국민이 기대한 변화와는 거리가 멀었다.

지난 국정감사에서 보건복지부 장관이 직접 “사전조제 제도 개선”과 “원료·품질 관리 강화”를 약속했음에도, 정작 인증기준에는 개선의 흔적을 찾아보기 어렵다는 비판이 터져 나온다. 이번 공청회에서 대한한약사회가 강하게 문제를 제기한 이유도 여기에 있다.

■ ‘사전조제’라는 이름의 대량생산… 규제 사각의 합리화인가
한약의 사전조제는 불특정 다수에게 투약할 목적으로 대량 생산하는 행위다. 제조 절차와 생산 규모만 보면 제약회사의 한방의약품 생산과 다르지 않다. 그러나 복지부는 이를 “한의사의 의료행위”라는 이유로 사실상 무제한 허용하고 있다.

의약품을 관리·감독하는 식약처의 기준을 적용받지 않기 때문에 안전성·유효성 검증 체계 밖에서 대량생산이 이뤄지는 구조가 고착되고 있다.

이는 환자에게 맞춤형으로 조제하는 ‘첩약’의 원래 정체성을 흔들 뿐 아니라, 한약 산업의 해외 확장성과도 정면으로 배치된다. 규격화·표준화 없이 제조된 한약은 제3자 판매나 수출 자체가 불가능하며, 결국 한약의 세계화 가능성을 스스로 차단하는 셈이다.

■ ‘비규격품 허용’이라는 후퇴… 국민 신뢰는 어디에
더 심각한 문제는 인증기준안이 비규격품 한약재 사용을 또다시 허용하고 있다는 점이다. 규격품의 생산 실적이 없다는 ‘증빙’만 갖추면 예외를 인정한다는 조항은 그동안 국회가 수차례 지적해온 안전성 문제를 무력화시킨다.

현행 의료법과 약사법에 따르면 규격품 미사용은 의료기관 영업정지·의료인 자격정지까지 가능한 중대한 사안이다. 그런데 인증기준은 이런 법적 취지를 거스르며 사실상 관행을 제도화하고 있다.

‘안전성 확보’라는 인증제도의 본래 목적이 무색할 정도의 후퇴다.

■ 외부위탁조제까지 ‘합격’ 처리… 제조와 조제의 경계는 실종
한약 분말화·엑스화 과정의 외부위탁을 당연시하는 조항도 도마 위에 올랐다.

이는 무허가 의약품 제조, 조제실 외부 조제 등 약사법 위반 소지가 농후한 영역이다.

그럼에도 이번 기준안은 ‘인증된 원외탕전실에 위탁하면 합격’이라는 식으로 이를 제도적으로 인정했다.

법적 문제를 품은 구조를 그대로 유지한 채 인증만 부여한다면, 제도는 존재 의미를 잃는다.

■ 전문가단체가 빠진 TF… 논의 구조부터 왜곡되어
3주기 인증기준안을 만든 TF에서 한약사회, 한의사협회 등 주요 전문단체가 배제된 사실도 납득하기 어렵다.

제도의 핵심 당사자를 배제한 채 만들어진 기준이 현장의 문제를 반영할 리 없다.

복지부가 “큰 그림의 제도개선”을 약속해도, 실제 기준에 이를 구현할 구조가 애초부터 부재한 것이다.

■ 중국은 첩약 연구비 중단… 세계는 제제 중심으로 간다
공청회에 참석한 김진현 교수의 지적처럼, 한약의 과학화·표준화는 더 이상 선택이 아니라 생존의 문제다.

중국은 이미 ‘전통 첩약 연구’에는 국가 연구비를 지원하지 않고, 제제화 연구에만 투자하는 국가 전략으로 방향을 바꾼 지 오래다.

국제 기준에 맞지 않는 조제 방식에 머무른다면 한국의 한약은 국제 경쟁력을 확보하기 어렵다.

■ 국민 눈높이에 맞는 정책… 핵심은 ‘안전성’과 ‘투명성’
한약사회는 “조제한약이 아닌, 식약처 관리 아래 생산되는 한방의약품이 활성화돼야 한다”고 강조한다. 이는 국민 입장에서 가장 합리적인 방향이기도 하다.

맞춤형 첩약이라는 정체성을 유지하려면 사전조제를 제한해야 하고, 대량 생산이 필요하다면 그 역할은 제조 허가를 받은 제약회사가 해야 한다.

단순하다. 국민이 요구하는 것은 ‘과학화·표준화·규격화’, 결국 안전성과 투명성이다.

■ 결론: 원외탕전 인증은 ‘편의의 논리’가 아니라 ‘국민의 기준’ 위에 서야
3주기 인증기준의 내용은 여전히 관행적 허용에 머물러 있다.
이번 기준안은 복지부가 약속한 제도개선과도 어긋나며, 한약 산업의 미래와 국민의 안전을 모두 담보하지 못한다.

원외탕전실은 환자의 체질에 맞춘 맞춤형 조제를 해야 한다.

그런데 사전조제와 대량생산, 비규격품 사용을 용인한다면 이는 더 이상 ‘맞춤형 의료’가 아니라 무규제 생산 시스템일 뿐이다.

복지부는 이제 선택해야 한다. 관행을 묵인할 것인가, 국민 눈높이에 맞는 제도개선을 시작할 것인가. 원외탕전 인증제도는 그 갈림길에 서 있다.